2008년 12월 13일
아바론(Avalon, 2001) 이야기

최근에 스카이크롤러와 공각기동대 2.0으로 이목을 모으고 계신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압정수(=오시이 마모루) 감독. 요즘 에스군은 그를 향한 빠심 하나로 그의 작품을 이것저것 구해다 보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페니웨이™ 씨의 '괴작열전'에도 소개된 바 있는 실사 영화 <아바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신선한 영화다. 압정수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깔린 사이버 펑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전투신의 특수효과 역시 참신하였다. 특히 게임 속 캐릭터가 죽거나 뭔가 터질 때의 경악감은...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그와 콤비를 이루는 카와이 켄지의 음악 역시 적절하기 그지 없다. 캐스팅 역시 탁월했다. 그의 팬이라면 초장부터 하악하악 거리며 봤을 것이라 사료된다.
근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터졌으니 그것은 바로
'보다보니 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타공인 압정수 빠돌이 에스군이 졸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거기다가 페니웨이 씨가 '지루하다'고 리뷰한 것에 어느정도 불쾌감을 가지고 보기까지 했는데도 그랬다. 왜 <아바론>은 졸립다고 하는가? 왜 다들 지루하다고 하는가? 이에 대한 가볍게 두 가지 소견을 풀어 내본다.
무의미한 영상
왜 똑같은 감독이 비슷한 작품을 연출해도 영화는 지루하고 애니는 흥미진진하느냐, 그 이유는 영상에서 포인트를 주어야 할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에 효과적인 편집이 따로 있고 애니에 효과적인 편집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애슈)과 그녀의 전 동료(스태너)와 식사를 하는 중에 스태너가 '안 먹겠다면 내가 먹지'라면서 스태너가 그녀 몫의 죽(?)을 긁어가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죽이 옮겨지는 것을 클로즈업해서 5초 정도 보여준다. 최고급 요리를 긁어가는 게 나와도 느낌이 시원찮을 마당에 그리 유쾌한 장면은 아닐 것이다.

이 장면을 5초 동안 감상하시게 된다
하지만 <아바론>이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어땠을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애니메이션을 볼 때 우리는는 무의식적으로 사실감을 따지고 있다.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이 분야에서 유체가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축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신을 잘 그려냈다면 관객들이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작은 감탄을 자아내게 할 수 있다. 물론 오시이 감독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반면 실사로 찍을 때는 이러한 기술적 요소가 전혀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유체에 카메라를 갖다 대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CG는 애니메이션이나 다름없으니 논외). 거대한 폭포도 아닌 기껏해야 죽 따위가 옮겨지는 이런 장면은 실사 영화에서는 아주 짧게만 보여주거나 아예 과감하게 잘라 버리는 것이 현명하며 또한 경제적인 처사이다. 대사 분량 때문에 그것조차 힘들다면 시종일관 음식을 입에 퍼넣으며 말하는 스태너보다 애슈 쪽에 중점을 두고 촬영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안 먹고 자리를 떠 버리니까. 영화 보면서 이런 류의 생각이 한 두 번 드는 것도 아니다.
지루한 구도
어디서나 본듯한, 데자뷰를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그녀가 귀가한 장면인데 어김없이 튀어나온 녀석을 보고 오시이 감독의 팬들은 미소를 지었으리라. 어쨌든 그녀의 집과 <이노센스>에서 나온 바토의 집과의 차이가 있다면 이쪽이 훨씬 더 삭막하다는 것이다. 뭔가 볼 만한 게 하나 없고 굳이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고정된 구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구도로 도합 근 1분, 관객에게 참 별난 방식으로 불친절하다
구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영화는 은근히 정지된 한 구도를 길게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듯이 느껴진다. 좀 다양한 방향에서 보여주면 어디 덧나겠느냐 이 말이다. 너무 산만하게 바뀌어도 문제지만 너무 정적이라서 관객이 지루해질 정도면 그것 또한 곤란하다. 그래도 그 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3년 뒤에 나온 <이노센스>에서는 신기한 오르골이라든가 유리공 같은 것을 클로즈업하는 장면, 개밥 준비하는 장면 등으로 계속 전환되어 이 작품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요는 이렇다.
애니메이션이었으면 찬사를 들었겠지만 실사 영화에서는 넣으나마나 할 정도로 무의미한 장면들이 많다. 애니메이션이었으면 대박이었을 연출(효과)가 실사 영화에서는 오히려 긴장의 흐름을 끊는 악영향을 낳고 있다. 등장인물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메꿔줄 볼거리가 적다. 이 모든 것들이 버무려져서 <아바론>이 '지루하다'라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것이다.
감독의 연출력을 깎아내리자는 건 아니다. 작품 내용면에서 난해함이 존재한다 뿐이지 그는 가히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고 할 만하다. 사건은 조용하게 진행되다가 박진감있게 터져 나온다. 슬로우 모션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장면은 한없이 느려진다. 빠르게 진행되는 장면 중에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영상미가 아이디어와 넘쳐난다. 극사실화된 3D와 CG는 작품 속에서 작화와 혼연일체의 하모니를 이뤄낸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는 어디까지나 애니메이션에 한정했을 때이다. 애니메이션에서 성공한 감독들이 실사로 넘어가면 작품성 자체부터 문제를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같이 너무 애니메이션적인 발상에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대체로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유치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어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오시이 마모루가 영화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영화에서 죽을 쑤는 이유는 영화를 애니메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게 찍었다는 것,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P.S : 왜 제가 밤새 이 글을 쓰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 by | 2008/12/13 02:16 | 주절주절 | 트랙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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